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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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1-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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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국(China) 근무를 통해 실무적으로 많은 것을 습득한 것은 사실이나. 반면에 반드시 순탄하게 출세가도를 달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던 중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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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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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12년 4월 그는 본국 대기명령을 받고 가족과 함께 6월 도쿄로 돌아왔다. 이윽고 그가 7월 30일에 죽자 연호가 메이지에서 다이쇼로 바뀌었고 요시다는 안동에 영사근무 발령을 받았다. 내각은 일개 영사의 意見을 무시했고, 중국(China)에 강요해 국제여론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듬해 7월, 요시다는 외무성 문서과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었는데 이 직책은 요시다에게는 한직이었다.
요시다시게루
순서
(1) 요시다의 성장과정
(2) 외교관 시대
(3) 평화활동가로서의 시대
(4) 전후의 재상으로서의 시대
(5) 요시다 내각의 종결
(6) 요시다에 대한 평가
(6) 전후 Japan의 주요사건
(2) 외교관 시대
1906년 11월 영사관보로 천진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때부터 1928년 봉천 총영사직을 마치고 Japan에 귀국할 때까지 약 20년간에 걸쳐 해외생활의 대부분을 중국(China) 각지에서 영사와 총영사로 지냈으며, 그 사이사이에 불과 몇 년간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 때 오오쿠마 내각의 對중국(China) 21개조 요구에 혼자 반대했다. 그런데 외무성안에서 출세가도를 걷는 데는 중국(China)보다도 서구 근무가 훨씬 유리했다. 1912년(다이쇼 원년)에 요시다는 조선총감부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미 메이지 천황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안동에 9월에야 도착해 1916년 10월까지 약 4년간 근무했다.
1908년 11월에 도쿄에 잠시 돌아와 있는 사이에 그는 외무성으로부터 런던 근무를 명령받고 근무를 하였고 1909년12월에는 대사관 3등 서기관에 임명돼 이탈리아 근무를 했다. 중국(China)은 Japan 외교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이것이 불씨가 되어 워싱턴 근무 명령을 받고 준비하던 중 발령이 취소되고 임시사무를 보게 되는 등 1917년 귀국 후 요시다는 좌천되었다. 이로 인해서 1916년 10월 요시다는 귀국명령을 받고 11월에는 Japan으로 돌아왔다.
안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대면해 있는 만주의 입구로 Japan의 대륙진출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